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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마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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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시마 히로시는 일본 육군 중장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 주독일 일본군 무관으로 부임하여,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아돌프 히틀러 및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친분을 쌓았다. 그는 1938년 주독일 대사로 임명되어, 반 코민테른 조약 및 삼국 동맹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전쟁 계획과 정책에 대한 정보를 일본에 보고했으나, 이 정보는 연합군에 의해 해독되었다.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55년 감형으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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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마 히로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시마 히로시 (1942년)
이름오시마 히로시
원어 이름大島 浩
로마자 표기Ōshima Hiroshi
출생일1886년 4월 19일
출생지기후현 에나군 이와무라정 (현 에나시)
사망일1975년 6월 6일
사망지도쿄
별명주독 독일 대사
묘소도코인 (에나시) 및 다마 영원
군사 정보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6년 - 1945년
최종 계급육군 중장
주요 참전시베리아 간섭
제2차 세계 대전
훈장독일 독수리 훈장 (1등급)
가족 정보
배우자도요코 오시마 참고 자료
기타 정보
이후 활동나치 독일 일본 대사

2. 초기 경력

오시마 히로시는 기후현 출신으로, 일본 육군 중장과 육군 대신을 지낸 오시마 겐이치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부터 1924년까지 부다페스트오스트리아 에서 주재 무관을 지냈으며, 일본에 귀국한 후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제10포병 연대의 지휘관을 지냈다.[1]

2. 1. 출생과 성장 배경

오시마 히로시는 기후현 출신으로, 일본 육군 중장과 육군 대신을 지낸 오시마 겐이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태어나[19] 도쿄에서 성장했으며, 신주쿠구립 아이니치소학교(도쿄 우시고메키타마치)에서는 훗날 게이단렌 회장을 역임한 이시자카 타이조와 동급생이었다.

1898년 도쿄도립 도야마고등학교(당시 도쿄부립사중)에 입학하여 1학년을 수료한 후 육군소년학교 입학 자격을 얻었고, 1899년 9월 도쿄육군지방소년학교에 입학했다.[20] 1904년 11월 육군소년학교를 졸업했다. 도쿄육군지방소년학교 동기로는 토죠 히데키가 있었다.[19]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05년 6월 제18기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6년 6월 소위, 1908년 6월 중위로 진급했다. 1915년 5월 제27기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대위로 진급했다.[1]

아버지는 독일을 매우 좋아하여 아들 오시마 히로시에게 독일어 교육과 독일식 훈육을 베풀었고, 히로시는 매일 독일어 단어 10개를 암기하여 아버지 앞에서 암송하는 것이 의무였다.[19] 소년학교 시절에는 주말에 독일인 가정을 방문하여 독일어 회화에 친숙해지고, 장기 휴가 때는 독일인 가정에 맡겨지는 등의 생활을 했다.[19]

2. 2. 군 경력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부터 1924년까지 부다페스트오스트리아 에서 주재 무관을 지냈다.[1] 일본에 귀국한 후에는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제10포병 연대의 지휘관을 지내기도 했다.[1]

1934년, 오시마 대령은 베를린 주재 일본군 무관이 되었다.[1] 그는 독일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고, 곧 아돌프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외교 정책 자문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친분을 맺었다.[2] 1935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오시마는 그 해 가을 히틀러와 비밀리에 만났다.[1] 나치 지도부와 일본군 참모본부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승진하여 중장 계급에 올랐고, 1938년 10월 독일 대사로 임명되었다.[1]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이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확보한 실제 퍼플 기계의 일부. 전시 사진에는 오시마가 히틀러와 악수하는 모습이 보인다. 리벤트로프는 중앙에 서 있다.


대사로 부임한 초기 몇 달 동안, 그는 자신의 대의에 동조하는 러시아 첩보원들을 이용하여 요셉 스탈린 암살을 계획했다.[3] 1939년 1월 31일 하인리히 힘러와 나눈 대화에서 오시마는 정보 분야에서 독일-일본 협력이 결국 소련의 붕괴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4] 그는 1936년 11월 25일 반 코민테른 조약과 1940년 9월 27일 삼국 동맹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1939년 8월 25일, 독일 정부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독일 동맹 및 방위 협정에 대한 협상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 오시마는 책임을 지기 위해 1939년 9월 일본으로 소환되었고, 12월 27일 대사직에서 해임되었다.[1] 그러나 나치 정부의 압력으로 1941년 2월 대사로 베를린에 복귀하여 1945년 5월 독일 항복까지 그 직책에 머물렀다.[1]

오시마는 히틀러와 리벤트로프와의 긴밀한 관계로 독일의 전쟁 계획과 국가 정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동부 전선대서양 방벽을 방문했고, 히틀러와 다른 나치 지도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났다.[1] 그는 나치로부터 제공받은 정보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퍼플 외교 암호를 통해 도쿄로 무선으로 전송했다.[1] 그러나 일본은 몰랐지만, 퍼플 암호는 1940년 미국 암호 해독가들에 의해 해독되었고, 오시마의 보고서는 연합군 지도자들과 분석가들이 거의 동시에 읽었다.[1]

3. 주독일 외교관

1921년, 주재무관보로서 처음으로 독일에 부임하여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강한 개인적 관계를 맺었다. 1938년에는 주독일 일본 대사에 취임하여 일독 동맹 체결을 추진했으며, 1940년에 조인된 일독이 삼국 동맹도 강력하게 지지했다.

오시마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육군 군인으로, 1938년 주독일 대사로 임명되어 일독 동맹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는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여 아돌프 히틀러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등 나치 지도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히틀러가 오시마 히로시를 만나는 모습


히틀러는 오시마를 매우 신뢰하여 금색 독일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오시마는 히틀러와 리벤트로프와의 친분으로 독일의 전쟁 계획과 정책에 대한 정보를 얻어 퍼플 외교 암호로 도쿄에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940년에 퍼플 암호를 해독하여 오시마의 보고 내용은 연합군에게도 알려졌다.

오시마는 동부 전선대서양 방벽을 방문하여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그는 나치 이념에 동조하여 "나치보다 더 나치 같은 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도 오시마는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는 보고를 계속했지만, 결국 독일은 패망하고 오시마는 A급 전범으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55년 가석방되었다.

3. 1. 첫 번째 독일 주재 (1934-1939)

1934년 오시마는 대좌로 승진하면서 다시 베를린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독일인에게 독일어를 배워 이를 완벽히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히틀러의 외교담당 비서였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친한 사이가 되었다.[2]

리벤트로프의 주선으로 1935년 가을 오시마는 히틀러를 개인적으로 만났다. 히틀러와의 친분은 독일과 동맹을 추진하던 육군 수뇌부에게 그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이는 승진에 도움이 되어 독일에 주재시 군에서 소장으로 승진하였고, 1938년에는 주독일 대사가 되었다.[3] 1936년 독일-일본-이탈리아가 맺은 방공 협정[26][27]과 1940년에 맺은 삼국 동맹 조약의 결성에는 그의 역할이 컸다.

그는 외국인이었지만 나치 이념의 강한 동조자였기 때문에, 훗날 당시 독일에 주재하던 미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L. 샤이러는 유명한 저서 "제3제국의 흥망"에서 그를 가리켜 "나치보다 더 나치같은 자"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외교관들은 그를 "주독일 독일대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남프랑스의 독일군 방어 거점을 시찰 중인 오시마(사진 중앙, 1943년)


아돌프 히틀러와 악수하는 오시마(1942년)


히틀러와의 친교때문에, 오시마는 다른 어떤 외국인보다도 독일의 고급 정보나 정책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또한 히틀러는 진주만 공격 후에 8명밖에 받은 바 없는 "독일 독수리 대십자 훈장"(Verdienstorden vom Deutschen Adler) 을 일본 대사였던 오시마에게 수여하기도 하였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 오시마는 독일의 러시아 전선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정기적으로 히틀러나 나치 고급인사들과 접촉을 가졌다. 오시마는 이렇게 얻은 고급정보를 일본의 외교 암호기기인 퍼플(PURPLE)을 통해 무선으로 도쿄에 타전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1940년 이미 퍼플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으며, 오시마가 본국에 전송하는 고급 정보는 그대로 미국의 손에도 들어갔다. 훗날 미국의 합참의장 조지 마셜은 오시마를 가리켜 "히틀러의 의도에 관한 정보의 기초적 원천"이라고 말했다.

특히 1943년 11월, 오시마는 "대서양 방벽" (독일의 해안 방위선)에 배치되어 있는 독일군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일본에 전송했는데, 이는 그대로 미국에 누설되어, 결국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39년 8월 25일 독일의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을 일독방공협정 위반으로 간주하여 일독동맹 협상 중단을 각의 결정하였다. 더 나아가 일독방공협정 위반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히라누마 내각이 총사퇴하는 등 일본 정계를 뒤흔드는 큰 혼란이 발생하였다.[29] 이 책임을 지고 베를린에서 귀국 명령을 받았다.[19] 귀국 후 사직서를 제출하여 대사직에서 물러났다.[19]

3. 2. 두 번째 독일 주재 (1940-1945)

오시마는 1940년 12월에 주독일 대사로 재임되었다.[30] 1941년 3월 27일에는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의 베를린 방문 시 마쓰오카-히틀러 회담에 참석했다. 1941년 4월, 오시마는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베를린에 있던 마쓰오카 요스케에게 일소불가침조약 체결을 하지 말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마쓰오카는 오시마의 조언을 무시하고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다.[31]

같은 해 6월 5일, 오시마는 히틀러와 면담하여 독일이 소련에 전쟁을 일으킬 의도가 있음을 간파하고, 마쓰오카에게 독일과 소련은 가까운 시일 내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타전했지만, 마쓰오카는 이를 무시했다.[32] 결과적으로 오시마의 정보는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고(독소전쟁), 오시마의 정보는 좋든 나쁘든 신뢰를 얻게 되었다.[33] 일본은 1941년 12월부터 참전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관되게 친독 정책을 추진했다.

오시마는 독일 나치스 정책에 심취해 있었고, 독일 주재 중에는 "자세에서 행동에 이르기까지 독일인 이상으로 독일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윌리엄 L. 샤이러는 오시마를 "나치 이상의 국가 사회주의자"라고 평가했다.[34]

주일 독일 대사 취임 후에는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며 나치당 간부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에게 접근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오시마는 히틀러와 리벤트로프와의 긴밀한 관계로 외국인으로서는 독일의 전쟁 계획과 국가 정책에 대한 비할 데 없는 접근 권한을 얻었다. 이는 윈스턴 처칠이 미국 전쟁 지도부와 가진 관계와 비견될 만하다. 반대로 히틀러는 군국주의적인 일본인을 존경했고 오시마를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다.

히틀러는 오시마를 매우 존경하여 그에게 금색 독일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을 수여한 15명 중 한 명이었다. 히틀러는 1941년 진주만 공격 후 이 훈장을 수여했다. 시상식에는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이 참석했고, 회의 비밀 기록은 1945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공개되었다. 히틀러는 오시마에게 "당신은 올바른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 방법이 유일하게 적절한 방법입니다. 일본은 이전에도 그렇게 했고, 그것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협상하는, 즉 그 자신의 시스템에 부합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시간을 끌고, 자신을 모욕하고 굴욕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고, 합의에 이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가능한 한 강하게 공격하고, 선전포고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1]

오시마는 동부 전선대서양 방벽을 방문했고, 히틀러와 다른 나치 지도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났다. 훈련받은 꼼꼼한 군인이었던 그는 나치로부터 제공받은 정보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퍼플 외교 암호를 통해 도쿄로 무선으로 전송되었다. 일본은 몰랐지만, 퍼플 암호는 1940년 미국 암호 해독가들에 의해 해독되었다. 따라서 오시마의 보고서는 일본의 상관들과 연합군 지도자들과 분석가들이 거의 동시에 읽었다. "매직" 정보로서 말이다. 독일과 일본 간의 전송 문제로 보고서가 몇 시간 동안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때로는 연합군이 일본보다 먼저 보고서를 읽기도 했다.

1941년 2월 13일, 오시마는 리벤트로프와 함께 영국과 미국에 대한 독일-일본 공동 전쟁 개시 가능성을 논의했고, 아시아에서 영국 제국을 공격할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데 동의했다.[8] 1941년 2월 23일, 리벤트로프는 그에게 동아시아의 영국령 공격을 위한 일본 정부 압박을 촉구했다.[9] 1941년 11월 28일, 독일 외무장관과의 대화에서 오시마는 미국과의 전쟁 시 제3제국이 일본 정부에 합류할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10]

오시마의 반소(反蘇)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1941년 4월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독일군은 6월에 소련을 침공했고, 독일 정부는 일본의 소련 동시 공격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침공 전에 독일 정부는 오시마에게 공격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1941년 5월 17일 회담에서 독일 외무성 국무장관인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는 소련 정부와의 긴장이 없다고 부인했다.[12]

1941년 6월 22일 소련 침공 이후, 일본 정부에 대한 침공 참여 압력이 가해졌다. 1942년 7월 9일 리벤트로프는 오시마를 설득하여 소련 공격에 참여하도록 촉구하려 했다. 리벤트로프의 주된 주장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거대 세력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현재와 같은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13] 1943년 3월 6일 오시마는 리벤트로프에게 일본 정부의 다음과 같은 공식 성명을 전달했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을 절대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일본이 러시아에 대한 전쟁에도 참전하기를 바라는 독일 동맹국의 희망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전쟁 상황을 고려할 때 일본 정부가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지금 러시아와의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공동 이익에 부합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 정부는 러시아 문제를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14]

오시마는 히틀러의 높은 신임을 받아 전쟁 범죄 및 잔혹 행위로 규정될 행위들과 관련된 계획 일부를 알게 되었다. 한 예로 1942년 1월 3일 오시마와 히틀러 사이에 열린 회의에서 두 사람은 군사 행동으로 침몰한 함선에서 탈출한 연합군 해군 인원 구조 작업을 하는 구명정을 침몰시키는 데 동의했다. 공식 문서에는 "총통은 미국이 아무리 많은 배를 건조하더라도 주요 문제 중 하나는 인력 부족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이유로 상선조차도 경고 없이 침몰시켜 승무원을 가능한 한 많이 죽일 의도였다. 대부분의 선원이 침몰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미국은 곧 새로운 인원을 모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선원을 훈련하는 데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우리의 태도는 어떤 인도적인 감정으로도 지배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외국 선원을 포로로 잡을 수 없는 경우, 대부분 바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U보트가 어뢰를 발사한 후 수면으로 떠올라 구명정을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려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1944년 5월 27일 오시마가 히틀러와 리벤트롭과 가진 회의에서 히틀러는 일본 정부가 공습에 가담한 미군 조종사를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하여 추가 공격을 억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시마가 대사로서 보낸 거의 모든 암호문은 가로채였다. 1941년 마지막 11개월 동안 약 75건, 1942년 약 100건, 1943년 400건, 1944년 600건, 그리고 독일이 전쟁 중이었던 1945년 4개월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약 300건이었다.[17] 예를 들어, 1942년 1월 19일에 해독된 암호문에서 리벤트로프는 오시마에게 매일 정보 보고서를 제공하고 도쿄에 전달하겠다고 동의했다. 그는 "우리의 잘못으로 이 보고서가 유출되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므로, 이 보고서의 모든 취급은 엄격하게 비밀로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오시마가 일본 암호의 안전성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은 종종 일본 암호의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안일함은 일본의 스파이 활동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암호명 ''TO''로 알려진 스페인의 일본 스파이 네트워크(스페인 당국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음)가 수집한 정보의 상당 부분도 그를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 증거는 1944년 미국이 스페인 유조선에 석유를 싣는 것을 중단시켰다.

오시마의 예측 중 일부는 틀렸지만(오시마는 영국이 1941년 말 이전에 독일에 항복할 것이라고 예측했음), 나치 지도부의 계획과 정책에 대한 그의 보고와 사실 데이터는 연합군에게 매우 귀중한 정보였다. 예를 들어, 1941년 6월 6일 그는 도쿄에 독일이 6월 22일에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통보했다(바르바로사 작전 참조).

또 다른 예로, 1943년 11월 오시마는 프랑스 해안의 대서양 방벽 요새를 4일간 시찰했다.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방문에 대한 20페이지 분량의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모든 독일 사단의 위치와 병력, 무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전차 참호, 해안 근처에 위치한 포탑의 무장, 그리고 이용 가능한 기동 부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는 D-데이 상륙 작전 계획자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와 관련하여 연합군은 포티튜드 작전이 효과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D-데이 1주일 전 히틀러는 오시마에게 연합군이 노르웨이, 브르타뉴노르망디에 속임수 공격을 가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도버 해협 지역에 "전면적인 제2전선을 열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오시마는 독일군의 주력이 노르망디가 아닌 파드칼레 지역에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이는 잘못된 예측이었다.

오시마는 특정 독일 표적에 대한 연합군 폭격의 효과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제공하여 연합군에게 상대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폭격 피해 평가를 제공함으로써 유럽에서의 폭격 작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도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1945년에 이르러서도 일본 정부는 주스위스 공사 사카모토 미즈오로부터 독일 제3제국 붕괴라는 본국 전보를 묵살하고, 오시마의 독일 유리라는 잘못된 전황 보고를 계속 중시했다.[35][36][37] 독일을 일방적으로 믿고 계속했던 오시마의 암호 전보는 모두 연합국 측에 해독되었고, 영미의 작전 수행에 유리하게 활용되었다.

같은 해 4월에 적군이 베를린에 압박하자, 오시마는 독일 정부의 요청을 받아 일부 고관들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온천 휴양지인 바트 가스타인으로 피난했다.[38]

4. 독일의 항복과 전범 재판

오시마 히로시(1947년)


독일의 패전이 짙어지는 상황에서도 오시마는 독일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으나, 1945년 3월 베를린 함락이 임박했음을 도쿄에 알리고 오스트리아의 바트가스타인으로 피신했다. 독일 항복 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미국으로 이송, 펜실베이니아주 호텔에 연금되었다가 일본 항복 후 귀국했으나, 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침략전쟁을 계획한 혐의로 1948년 12월 12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39] 1955년 감형으로 석방된 후,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에서 은거하며 자유민주당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를 받았으나, "국가를 잘못 이끈 죄가 있다"며 거절하였다. 이후 공직에 나서지 않고 은거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4. 1. 독일의 패전과 체포

독일의 전황이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오시마는 독일의 최종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1945년 3월, 베를린 함락이 임박했음을 도쿄에 알렸고, 다른 일본 외교관들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바트가스타인으로 피신했다.[39]

독일 항복 후, 오시마는 연합군에 체포되어 미국으로 이송되었고, 펜실베이니아주의 한 호텔에 연금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후, 일본으로 돌아와 잠시 자유를 누렸으나, 12월에 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되었다.[41]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침략전쟁을 꾸민 혐의로 1948년 12월 12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39] 1955년 감형으로 석방된 후,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에서 은거하며 자유민주당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를 받았으나, "국가를 잘못 이끈 죄가 있다"며 거절하였다. 이후에도 공직에 나서지 않고 은거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4. 2. 극동 국제 군사 재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오시마는 침략 전쟁을 꾸민 혐의로 1948년 12월 12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42] 1955년 감형을 받아 석방되었다. 이후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에 은거하였고, 자유민주당으로부터 몇 차례 의원 출마 권유를 받았으나, "본인은 국가를 잘못 이끈 죄가 있다"며 거절하였다.

오시마가 A급 전범으로 기소된 가장 큰 이유는 일·독·이 삼국 동맹 추진에 있었다. 그러나 법정에서 오시마는 "히틀러나 리벤트로프와는 거의 만난 적이 없다"고 증언했으며,[19] 삼국 동맹을 주도한 것 등 자신에게 불리한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판사들의 투표 결과, 오시마는 1표 차이로 교수형을 면하고[18]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다.[42]

오시마는 만년에 태도를 바꿔 정치가였던 히로타 고키 등이 사형된 것에 대해 "내가 전쟁에 대한 책임이 더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항상 미안한 기분이 든다"고 1965년경 발언했다.[18]

5. 석방과 만년

독일의 전황이 악화되었음에도 오시마는 독일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3월, 베를린 함락이 임박했음을 도쿄에 알렸고, 이후 오스트리아의 바트 가스타인으로 피신했다.

독일 항복 후, 오시마는 연합군에 체포되어 미국으로 이송, 펜실베이니아주의 한 호텔에 연금되었다. 일본 항복 후 일본에 돌아와 자유를 얻었으나, 12월에 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침략전쟁을 꾸민 혐의로 1948년 12월 12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감형으로 석방된 후,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에 은거하며 자유민주당의 출마 권유를 받았으나, "국가를 잘못 이끈 죄가 있다"며 거절하였다.[45][19]

이후에도 공직에 나서지 않고 은거생활을 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6. 평가 및 영향

오시마 히로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육군 군인이었다. 1921년 주재무관보로 처음 독일에 부임하여 나치당과 강한 개인적 관계를 맺었다. 1938년 주독일 일본 대사로 취임하여 일독이 삼국 동맹 체결을 추진하는 등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과 나치 독일 사이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일본에 보낸 정보가 미국에 의해 해독되어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 종전 후에는 A급 전범으로 무기징역에 처해져 1955년까지 복역했다.

6. 1. 나치즘에 대한 경도

오시마 히로시는 외국인이었지만 나치 이념에 깊이 공감하여, 당시 독일에 주재했던 미국 언론인 윌리엄 샤이러는 그의 저서 "제3제국의 흥망"에서 오시마를 "나치보다 더 나치 같은 자"라고 묘사했다.[2] 일본 외교관들은 그를 "주독일 독일 대사"라고 부르기도 했다.[48]

1934년 오시마는 대좌로 승진하여 베를린 주재무관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그는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여 당시 히틀러의 외교담당 비서였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친분을 쌓았다.[2] 1935년 가을, 리벤트로프의 주선으로 오시마는 히틀러와 개인적으로 만났다. 히틀러와의 친분은 독일과 동맹을 추진하던 육군 수뇌부에게 그를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독일 주재 중 소장으로 승진했고, 1938년에는 주독일 대사가 되었다. 1936년 독일-일본-이탈리아가 맺은 반 코민테른 조약과 1940년에 맺은 삼국 동맹 조약 체결에 그의 역할이 컸다.

히틀러는 진주만 공격 이후 오시마에게 독일 독수리 대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이 훈장은 8명 밖에 받지 못한 훈장이었다.

독소전쟁 발발 후, 오시마는 독일의 러시아 전선을 자주 방문하며 히틀러나 나치 고위 인사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했다. 오시마는 이렇게 얻은 정보를 일본의 외교 암호기기인 퍼플을 통해 도쿄에 타전했다. 그러나 미국은 1940년 이미 퍼플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고, 오시마가 보내는 정보는 미국의 손에도 들어갔다. 미국의 합참의장 조지 마셜은 오시마를 "히틀러의 의도에 관한 정보의 기초적 원천"이라고 평가했다.

1943년 11월, 오시마는 "대서양 방벽"에 배치된 독일군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일본에 전송했는데, 이는 미국에 누설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오시마는 히틀러를 "천재 전략가"라고 평가했으며, 은거지였던 치가사키 자택 응접실에 자신과 히틀러가 마주 앉은 사진을 장식해 놓았다고 한다.[18] 그는 "국가의 세력 확장이 최우선 과제로 여겨졌던 당시의 가치 기준으로 측정하면, 히틀러는 알렉산드로스 3세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이어 천재였다"고 히틀러 사후 30년이 지난 후에도 말했다.[18]

6. 2. 정보 유출

오시마 히로시는 1934년 대좌로 승진하여 베를린 주재무관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그는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여 당시 히틀러의 외교담당 비서였던 리벤트로프와 친분을 쌓았다.[2] 1935년 가을에는 리벤트로프의 주선으로 히틀러를 개인적으로 만났다. 히틀러와의 친분은 그가 독일과의 동맹을 추진하던 육군 수뇌부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게 하였고, 이는 승진에 영향을 주어 소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38년에는 주독일 대사가 되었다.

그는 외국인이었지만 나치 이념에 강하게 동조하여, 훗날 미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샤이러는 "나치보다 더 나치같은 자"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34] 히틀러와의 친분으로 오시마는 독일의 고급 정보와 정책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진주만 공격 후 8명에게만 수여한 "독일 독수리 대십자 훈장"을 오시마에게 수여하기도 하였다.

독소전쟁 발발 후, 오시마는 독일의 러시아 전선을 자주 방문하며 히틀러나 나치 고위 인사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했다. 그는 이러한 고급 정보를 일본의 외교 암호기기인 퍼플을 통해 도쿄에 타전했다. 그러나 미국은 1940년 이미 퍼플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고, 오시마가 본국에 전송하는 정보는 미국의 손에도 들어갔다.[6][7] 훗날 미국의 합참의장 조지 마셜은 오시마를 "히틀러의 의도에 관한 정보의 기초적 원천"이라고 말했다.

1943년 11월, 오시마는 "대서양 방벽"에 배치된 독일군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일본에 전송했는데, 이는 미국에 누설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오시마가 보낸 거의 모든 암호문은 가로채였는데, 1941년 마지막 11개월 동안 약 75건, 1942년 약 100건, 1943년 400건, 1944년 600건, 1945년 4개월여 동안 약 300건이었다.[17]

1942년 1월 19일 해독된 암호문에서 리벤트로프는 오시마에게 매일 정보 보고서를 제공하고 도쿄에 전달하겠다고 동의하며, "우리의 잘못으로 이 보고서가 유출되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므로, 이 보고서의 모든 취급은 엄격하게 비밀로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오시마는 일본 암호의 안전성을 확신했지만, 독일인들은 종종 일본 암호의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안일함은 일본의 스파이 활동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암호명 ''TO''로 알려진 스페인의 일본 스파이 네트워크가 수집한 정보의 상당 부분도 그를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오시마의 예측 중 일부는 틀렸지만, 나치 지도부의 계획과 정책에 대한 보고와 사실 데이터는 연합군에게 매우 귀중한 정보였다. 예를 들어, 1941년 6월 6일 그는 도쿄에 독일이 6월 22일에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통보했다(바르바로사 작전 참조). 1943년 11월 오시마는 프랑스 해안의 대서양 방벽 요새를 시찰하고 2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모든 독일 사단의 위치와 병력, 무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D-데이 상륙 작전 계획자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7. 연표


  • 1905년 11월 - 육군사관학교(18기 은사) 졸업.
  • 1906년 6월 -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
  • 1908년 6월 - 중위로 승진.
  • 1915년 12월 - 육군대학교(27기) 졸업.
  • 1916년 5월 - 대위로 승진.
  • 1916년 7월 - 중포병 제2연대 중대장.
  • 1917년 2월 - 참모본부 배속.
  • 1918년 8월 - 시베리아 출장(~1919년 2월).
  • 1921년 5월 - 주독일대사관 부 무관 보좌관 취임.
  • 1922년 1월 - 소좌로 승진.
  • 1923년 2월 - 주오스트리아 공사관 겸 헝가리 공사관 부 무관 취임.
  • 1926년 8월 - 중좌로 승진.
  • 1928년 8월 10일 - 포병감부 부원
  • 1930년 8월 1일 - 야포병 제10연대장에 취임하고 대좌로 승진.
  • 1931년 8월 1일 - 참모본부 방위과장
  • 1934년 3월 5일 - 주독일대사관 부 무관 승진.
  • 1935년 3월 15일 - 소장으로 승진.
  • 1935년 10월 - 나치당 외교부장 리벤트로프와 첫 회담(이원 외교 시작).
  • 1936년 11월 25일 - 일독 반공협정 조인.
  • 1937년 11월 - 이탈리아, 일독 반공협정에 가입.
  • 1938년 3월 1일 - 중장으로 승진.
  • 1938년 8월 - 히틀러 유겐트 방일.
  • 1938년 10월 8일 - 예비역 편입. 주독일대사에 임명. 일독 반공협정을 일독 동맹으로 격상하는 데 분주.
  • 1939년 8월 23일 - 히틀러,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
  • 1939년 8월 25일 - 독일의 독소불가침조약 체결을 일독 반공협정 위반으로 일독 동맹 협상 중단을 각의 결정.
  • 1939년 8월 28일 - 독일의 일독 반공협정 위반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히라누마 내각 총사퇴.
  • 1939년 10월 7일 - 베를린에서 귀국 명령을 받음.
  • 1939년 12월 27일 - 대사 의원 면직.
  • 1940년 2월 - 오시마 히로시의 후임, 라이스 사부로 주독일대사에 임명.
  • 1940년 9월 27일 - 일독이 삼국 동맹 조인.
  • 1940년 11월 15일 - 히틀러가 일본 대사관 방문, 기원 2600년을 축하.
  • 1940년 12월 20일 - 주독일대사에 재임명.
  • 1941년 2월 17일 - 베를린 부임. 미디어 노출률이 높아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외교관 중 한 명이었다.
  • 1941년 3월 27일 -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 베를린 방문, 마쓰오카-히틀러 회담에 참석.
  • 1941년 6월 22일 - 독일군이 소련에 침공(바르바로사 작전).
  • 1945년 4월 13일 - 소련군이 베를린에 접근하자 독일 남부 바트 가스타인으로 피난.
  • 1945년 12월 6일 -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됨.
  • 1948년 11월 12일 -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무기징역.
  • 1955년 11월 - 감형, 출옥.
  • 1975년 6월 6일 - 사망.


; 계급

; 훈장 등

참조

[1] 서적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2] 논문 Japanese Foreknowledge of the Soviet-German War, 1941 1972-04-00
[3] 법률문서 Trial of Major German War Criminals 1939-01-31
[4] 법률문서 Trial of Major German War Criminals
[5] 외교문서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36 1936-12-04
[6] 기타 Bōchō ni kansuru kaisō chōshuroku Bōei Kenkyūsho 1959-11-00
[7] 서적 Eavesdropping on the Emperor: Interrogators and Codebreakers in Britain's War with Japan Hurst & Co. 2021-00-00
[8] 법률문서 Nazi Conspiracy and Aggression
[9] 법률문서 Trial of Major German War Criminals
[10] 법률문서 Trial of Major German War Criminals
[11] 법률문서 Trial transcripts at Nuremberg http://www.nizkor.or[...] 1945-12-11
[12] 법률문서 Trials of War Criminals before the Nürnberg Tribunals
[13] 법률문서 Trial of German Major War Criminals
[14] 법률문서 Trial of German Major War Criminals
[15] 법률문서 Nazi Conspiracy and Aggression
[16] 법률문서 Trial of German Major War Criminals
[17] 서적 Hitler's Japanese Confidant: General Ōshima Hiroshi and MAGIC Intelligence, 1941-1945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00-00
[18] 웹사이트 <文壇こぼれ話⑤>取れなかった原稿② 大島 浩さん https://web.archive.[...] 2007-01-01
[19] 서적 増田(2022年)
[20] 서적 増田(2022年)
[21] 기타 2人とも、ドイツ共産主義革命家であり「スパルタクス団」のリーダー。
[22] 서적 増田(2022年)
[23] 서적 増田(2022年)
[24] 서적 増田(2022年)
[25] 서적 増田(2022年)
[26] 서적 増田(2022年)
[27] 서적 増田(2022年)
[28] 서적 増田(2022年)
[29] 서적 増田(2022年)
[30] 서적 増田(2022年)
[31] 서적 増田(2022年)
[32] 서적 増田(2022年)
[33] 서적 増田(2022年)
[34] 서적 シャイラー(1961年)
[35] 서적 増田(2022年)
[36] 서적 増田(2022年)
[37] 서적 増田(2022年)
[38] 웹사이트 危機のときの外交官 http://www.business-[...] フジサンケイ・ビジネスアイ 2007-06-13
[39] 서적 増田(2022年)
[40] 뉴스 近衛・木戸ら九人に追加逮捕命令 毎日新聞(東京) 1945-12-07
[41] 서적 増田(2022年)
[42] 서적 増田(2022年)
[43] 방송 昭和の選択「破局への条約 三国同盟 ~松岡外相と影のキーマン 大島浩」 NHK BSプレミアム 2022-09-21
[44] 서적 増田(2022年)
[45] 웹사이트 朝日新聞デジタル:(133)駐独大使・大島浩、晩年の言葉 - 神奈川 - 地域 http://www.asahi.com[...]
[46] 서적 増田(2022年)
[47] 서적 増田(2022年)
[48] 서적 増田(2022年)
[49] 서적 華族 明治百年の側面史 講談社 1968
[50] 서적 増田(2022年)
[51] 법률문서 法廷証第121号: [大島浩關スル人事局履歴書]
[52] 간행물 官報 1941-10-23
[53] 웹사이트 ヒトラーに傾倒した男〜A級戦犯・大島浩の告白〜 https://www.nhk.jp/p[...] NHK 2021-08-14
[54] 웹사이트 昭和の選択「破局への条約 三国同盟 ~松岡外相と影のキーマン 大島浩」 https://www.nhk.jp/p[...]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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